땅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
내가 어렸을때 생명이 있든 없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제스처(흔적, 표시)와 메시지(의도, 주장), 자세(태도)를
가지고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라사 드 셀라 Lhasa de Sela (1972-2010)
제스처(흔적, 표시)와 메시지(의도, 주장), 자세(태도)를
가지고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라사 드 셀라 Lhasa de Sela (1972-2010)
“결코, 내리는 눈은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
결코, 눈은 떨어지기 시작한 곳으로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날, 눈 쌓인 언덕 위에서 생을 마감한 산책가 시인, 소설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의 글귀이다.
그리고 눈은 기백(élan)을 담고 날아가 소음의 흔적없이 침묵이라는 본질에 내려 앉아 눈의 기백은 조용히 재생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시초의 눈에게 삶의 불발을 역전시킨다. 다른 존재 방식으로 치환시키는 부드러운 타격 효과로 -‘지극한 자명함’이라는 또 다른 이름, ‘순수함’은 줄곧 발저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순수한 발설은 너무나도 청명하여 우는자와 웃는자로 갈린다. - 각 개체의 눈송이들을 침묵이라는 광야로 압축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생의 지연성을 확보하기때문이다. 사람 추연신은 주운 나뭇가지를 적정 습도로 말리고 깍는 과정을 거쳐 어떤 조합(물)이 아닌 단독(물)로서 하나의 주체적인 사물을 만든다. 조밀한 과정과 동행하는 손의 움직임에 의해 발현된 단독물로서, 사물의 이야기를 마치 특정 개인 인생사로 서술하듯 면밀하게 기록화하고 시각화하기도 하며 다른 구조의 대상물로 만들기도한다. 그러하기까지 사람 추연신은 땅 위에서 찰나적으로 무생물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자와 같다. 발견 다음 행해지는 ‘줍기’. 몸을 낮추어 무언가를 걷어 들이는 행위가 반복되면 채집과 수집으로 이어진다. 쓸모 없어 버려진 것을 주워 의미를 부여하거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기준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아네스 바르다(Agnès Varda)의 <이삭줍기와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2000> 영화가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바르다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줍기’는 사람 추연신의 행동과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자연 태생적인 물체 채집과 수집은 참으로 자연적이여서, 실로 자연적이라 초자연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의 작업 행로를 들으면서 포착한 시초의 태도, 행동인 ‘걷기'와 ‘땅 바라보기’는 마치, 행함없이 행하는 행으로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포획되어 다가온다. 땅에서 떼어진 한 걸음 한 걸음이 자발적과 비자발적 사이에서 반복 재생되는 울타리를 내칠 때마다 다가오는, 또 다가오게 될 사물의 초자연적 형상이 그려짐은 그리 가볍지 않다.
쇠약하고 가벼운 형세로 물체는 아래, 밑, 지면(地面)에서 도달해야 할 곳을 기다린다. 사람은 ‘걷기’라는 표류를 시작한다. 시선의 정지로 그들과의 여정의 조짐이 보인다. 땅 위에 내려 앉은 모든 것들은 무력해보인다. 그 상태는 무용한 상황에 이르고 자연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홀연히 사라지는 시간으로 입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땅 위에 떨어진 모든 것들은 연약하고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무게를 박탈당하고 사라질 태세를 하고 있다. 땅에 떨어진 모든 것은 부유한다.
연쇄 산책이 보내는 전갈의 형세와 형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에 추임새를 넣는다.
김온
결코, 눈은 떨어지기 시작한 곳으로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날, 눈 쌓인 언덕 위에서 생을 마감한 산책가 시인, 소설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의 글귀이다.
그리고 눈은 기백(élan)을 담고 날아가 소음의 흔적없이 침묵이라는 본질에 내려 앉아 눈의 기백은 조용히 재생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시초의 눈에게 삶의 불발을 역전시킨다. 다른 존재 방식으로 치환시키는 부드러운 타격 효과로 -‘지극한 자명함’이라는 또 다른 이름, ‘순수함’은 줄곧 발저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순수한 발설은 너무나도 청명하여 우는자와 웃는자로 갈린다. - 각 개체의 눈송이들을 침묵이라는 광야로 압축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생의 지연성을 확보하기때문이다. 사람 추연신은 주운 나뭇가지를 적정 습도로 말리고 깍는 과정을 거쳐 어떤 조합(물)이 아닌 단독(물)로서 하나의 주체적인 사물을 만든다. 조밀한 과정과 동행하는 손의 움직임에 의해 발현된 단독물로서, 사물의 이야기를 마치 특정 개인 인생사로 서술하듯 면밀하게 기록화하고 시각화하기도 하며 다른 구조의 대상물로 만들기도한다. 그러하기까지 사람 추연신은 땅 위에서 찰나적으로 무생물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자와 같다. 발견 다음 행해지는 ‘줍기’. 몸을 낮추어 무언가를 걷어 들이는 행위가 반복되면 채집과 수집으로 이어진다. 쓸모 없어 버려진 것을 주워 의미를 부여하거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기준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아네스 바르다(Agnès Varda)의 <이삭줍기와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2000> 영화가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바르다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줍기’는 사람 추연신의 행동과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자연 태생적인 물체 채집과 수집은 참으로 자연적이여서, 실로 자연적이라 초자연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의 작업 행로를 들으면서 포착한 시초의 태도, 행동인 ‘걷기'와 ‘땅 바라보기’는 마치, 행함없이 행하는 행으로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포획되어 다가온다. 땅에서 떼어진 한 걸음 한 걸음이 자발적과 비자발적 사이에서 반복 재생되는 울타리를 내칠 때마다 다가오는, 또 다가오게 될 사물의 초자연적 형상이 그려짐은 그리 가볍지 않다.
쇠약하고 가벼운 형세로 물체는 아래, 밑, 지면(地面)에서 도달해야 할 곳을 기다린다. 사람은 ‘걷기’라는 표류를 시작한다. 시선의 정지로 그들과의 여정의 조짐이 보인다. 땅 위에 내려 앉은 모든 것들은 무력해보인다. 그 상태는 무용한 상황에 이르고 자연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홀연히 사라지는 시간으로 입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땅 위에 떨어진 모든 것들은 연약하고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무게를 박탈당하고 사라질 태세를 하고 있다. 땅에 떨어진 모든 것은 부유한다.
연쇄 산책이 보내는 전갈의 형세와 형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에 추임새를 넣는다.
김온